6️⃣ 강. 고대(통일 신라, 발해)
⭐️ 문무왕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.
⭐️ 문무왕은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외사정을 파견하였다.
⭐️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.
⭐️ 신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집사부 시중(중시)의 권환을 강화하였다.
⭐️ 신문왕은 관리에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.
⭐️ 신문왕은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.
⭐️ 통일 이후 신라는 지방을 9주로 개편하였으며, 수도가 동남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완하기 위해 5소경을 설치하였다.
⭐️ 통일 이후 신라는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운영하였다.
⭐️ 신라는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.
⭐️ 신라 말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의 난 이후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심화되었다.
⭐️ 신라 말에 왕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호족들이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.
⭐️신라 말에 일부 6두품 세력은 골품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.
⭐️ 신라 말에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종이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성행하였다.
⭐️ 신라 말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도모하였다.
⭐️ 견훤은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고, 중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 후당,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.
⭐️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였다.
⭐️ 궁예는 송악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.
⭐️ 궁예는 광평성 등 각종 정치 기구를 마련하였다.
⭐️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천도하였다.
⭐️ 후백제군은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.
⭐️ 신검의 군대는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의 고려군에 패배하였다.
⭐️ 대조영은 지린성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웠다.
⭐️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 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.
⭐️ 발해 무왕은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 말갈을 정벌하게 하였고,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.
⭐️ 발해 무왕은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, 일본에 사신과 국서를 보냈다.
⭐️ 발해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3성 6부의 중앙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발해 문왕은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, 신라도를 개설하였다.
⭐️ 발해 선왕은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, 이 시기에 발해는 전성기를 이루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다.
⭐️ 발해의 중앙 관제는 당의 3성 6부를 모방하였으나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는 독자성을 가졌다.
⭐️ 발해의 3성 가운데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으며,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.
⭐️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.
⭐️ 발해는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.
📖 6강 추가 내용
<통일 신라의 왕>
태종 무열왕 👉🏻 최초 진골 출신 왕(김춘추)
문무왕 👉🏻 나당 전쟁 승리, 삼국 통일, 상수리, 외사정
신문왕 👉🏻 김흠돌의 반란, 관료전 지급, 녹읍 폐지, 집사부 시중 권한 강화, 상대등(화백회의) 권한 약화, 9주 5소경, 9서당 10정, 국학 설립
성덕왕 👉🏻 백성에게 정전 지급
경덕왕 👉🏻 녹읍 부활
<발해의 왕>
대조영 👉🏻 동모산에서 건국
무왕(인안) 👉🏻 흑수 말갈 정벌,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 공격, 일본에 사신과 국서 보냄
문왕(대흥) 👉🏻 3성 6부, 당의 선진 문물과 제도 수용, 신라도,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
선왕(건흥) 👉🏻5경 15부 62주, 해동성국
7️⃣ 강. 고대(경제, 사회)
⭐️ 신라의 관리에게 지급된 녹읍은 조세 수취와 노동력 징발이 가능하였다.
⭐️ 신문왕 때 관리에게 관료전이 지급되고 녹읍이 폐지되었다.
⭐️ 신문왕 때 폐지된 녹읍은 경덕왕 때 다시 부활하였다.
⭐️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.
⭐️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 문서(민정 문서)는 서원경 인근 4개 촌의 정보를 담고 있다.
⭐️ 신라 지증왕 때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이 설치되었다.
⭐️ 신라와 당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산둥반도 등지에 신라인의 집단 거주 지역인 신라방이 형성되었다.
⭐️ 통일 신라 시기에 당에 거주하는 신라인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인 신라소, 신라인을 위한 사찰인 신라원이 세워졌다.
⭐️ 통일 신라 시기에 당항성, 영암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.
⭐️ 통일 신라 시기에 수도 근처의 울산항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도 왕래하였다.
⭐️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하였다.
⭐️ 장보고는 당에 신라 사찰인 법화원을 설립하였다.
⭐️ 당의 산둥반도에는 발해의 사신들이 머무는 발해관이 설치되었다.
⭐️ 발해는 모피, 인삼, 자기, 담비 가죽 등을 수출하였는데 특히 솔빈부의 말이 특산물로 유명하였다.
⭐️ 발해는 신라도라는 상설 교통로를 두어 신라와 왕래하였다.
⭐️ 발해는 거란도, 영주도를 통해 주변 국가와 교류하였다.
⭐️ 백제는 정사암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재상을 선출하였다.
⭐️ 신라의 화백 회의는 귀족들로 구성되어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었다.
⭐️ 백제에서는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한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었다.
⭐️ 신라의 골품제는 개인의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규제한 폐쇄적인 신분제이다.
⭐️ 진흥왕 때 국가조직으로 정비된 신라의 화랑도는 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였다.
⭐️ 신라의 화랑도는 원광의 세속 5계를 행동 규범으로 삼았다.
⭐️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출신의 도당 유학생으로 귀국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.
⭐️ 최치원은 당에서 돌아와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였다.
⭐️ 신라 말에 진골 귀족 간의 왕위 다툼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하여 지방에서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.
⭐️ 신라 말에 6두품은 호족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기도 하였다.
📖 7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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8️⃣ 강. 고대(문화1)
⭐️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설치하여 유학 교육을 하였고, 지방에는 경당을 설치하여 청소년에게 글과 활 쏘기를 가르쳤다.
⭐️ 임신서기석을 통해 신라에서 유학 교육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.
⭐️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에게 조언하였다.
⭐️ 설총은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한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.
⭐️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여 청방인문표를 작성하였다.
⭐️ 김대문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화랑세기, 고승전, 한산기 등을 저술하였다.
⭐️ 최치원은 당에 건너가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, 토황소격문과 계원필경을 지었다.
⭐️ 신라 원성왕은 유교적 학식을 갖춘 관리 채용을 위해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.
⭐️ 고구려 영양왕 때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였다.
⭐️ 백제 근초고왕은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도록 하였다.
⭐️ 신라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.
⭐️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.
⭐️ 백제 금동 대향로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.
⭐️ 고구려 소수림왕은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.
⭐️ 백제 침류왕은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.
⭐️ 신라 의자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.
⭐️ 원효는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대승기신론소,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.
⭐️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였다.
⭐️ 의상은 화엄 사상을 정립하고 현세의 고난에서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강조하였다.
⭐️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.
⭐️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.
⭐️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.
⭐️ 서상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린다.
⭐️ 발해 이불병좌상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다.
⭐️ 백제 무왕 때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인다.
⭐️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목탑의 구조를 띈 석탑으로 평제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.
⭐️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만든 석탑이다.
⭐️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세워진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.
⭐️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은 석가탑이라고도 불리며, 신라식 석탑의 정형으로 간결하고 비례가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.
⭐️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.
⭐️ 신라 말에 선종의 유행으로 승탑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대표적으로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탑이 있다.
📖 8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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9️⃣ 강. 고대(문화 2)
⭐️ 고구려의 천문도는 조선 태조 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영향을 주었다.
⭐️ 금동 대향로와 칠지도는 백제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을 보여 준다.
⭐️ 신라는 천문 관측을 위해 첨성대를 세웠다.
⭐️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은 통일 신라 성덕왕 때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이다.
⭐️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범종은 성덕 대왕 신종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린다.
⭐️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.
⭐️ 백제 무왕은 익산 지역에 미륵사를 건립하였다.
⭐️ 신라 진흥왕은 경주에 황룡사를 건립하였다.
⭐️ 신라는 통일 후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려는 염원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하였다.
⭐️ 통일 신라 시대 별궁 터인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고도 불린다.
⭐️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의 수도 장안을 본떠 만들었는데 중앙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주작대로가 있었다.
⭐️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무덤 양식은 돌무지무덤으로 이를 통해 두 나라 건국 세력의 유사성을 알 수 있다.
⭐️ 굴식 돌방무덤에는 천장과 벽에 벽화가 남겨져 있기도 한데 이를 통해 당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.
⭐️ 공주의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묘지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.
⭐️ 신라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.
⭐️ 김유신 묘는 신라의 대표적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무덤의 둘레돌(호석)에 12지 신상이 새겨져 있다.
⭐️ 발해의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, 정효 공주의 묘는 벽돌무덤으로 만들어졌다.
⭐️ 발해 정혜 공주 묘의 천장 구조와 무덤에서 발견된 돌사자상 등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.
⭐️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 벽화와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 벽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두 나라가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.
⭐️ 고구려의 승려 담징은 일본에 종이와 먹 제조 기술 등을 전파하였으며,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.
⭐️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구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.
⭐️ 백제의 학자 왕인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하였다.
⭐️ 삼국 시대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일본의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의 형태가 유사한 것을 통해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.
⭐️ 신라의 축제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한인의 연못이 만들어졌다.
⭐️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이 일본에 전해져 스에키 제작에 영향을 끼쳤다.
⭐️ 삼국의 문화는 일본의 아스카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.
📖 9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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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️⃣0️⃣ 강. 고려(초기 정치)
⭐️ 고려의 건국 세력 가운데 대대로 고위 관리를 배출한 가문은 문벌을 형성하였다.
⭐️ 고려 말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은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리며 대농장을 소유하였다.
⭐️ 태조는 후삼국 통일 후 민생 안정을 위해 구휼 기관으로 흑창을 설치하였다.
⭐️ 태조는 호족에 대한 우호 정책으로 결혼 정책,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폈다.
⭐️ 태조는 호족에 대한 견제 정책으로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시행하였다.
⭐️ 태조는 경순왕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.
⭐️ 태조는 서경을 중시하여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.
⭐️ 태조는 정계, 계백료서 등을 저술하여 관리의 규범을 제시하였다.
⭐️ 태조는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다.
⭐️ 광종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해방시키기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공신 및 호족 세력을 견제하였다.
⭐️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과거제를 도입하였다.
⭐️ 광종은 광덕,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.
⭐️ 광종은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복색을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.
⭐️ 경종은 처음으로 직관, 산관 각 품의 전시과를 제정하였다.
⭐️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성종은 전국에 12목을 처음으로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.
⭐️ 성종은 지방 세력 통제를 위하여 향리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고려는 당과 송의 제도를 본떠 2성과 6부를 두고 중추원, 어사대, 삼사 등의 중앙 정치 기구를 설치하였다.
⭐️ 중추문하성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중앙 관서이며 수장은 문하시중이었다.
⭐️ 고려에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밀이 만나서 회의하는 재추 회의가 있었다.
⭐️ 도병마사는 주로 군사 관련 문제를 다루는 회의 기구였으며,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바뀌었다.
⭐️ 고려의 재추 회의 중 하나였던 식목도감은 법제와 격식을 논의하는 임시 회의 기구였다.
⭐️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은 대간이라고 불렸으며, 간쟁·서경·봉박의 권한을 가지고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.
⭐️ 고려의 중추원은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하는 기구였다.
⭐️ 고려의 어사대는 관리 감찰과 풍기 단속을,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는 기구였다.
⭐️ 고려의 지방은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와 군사 지역인 양계로 구성되었다.
⭐️ 고려는 5도에 안찰사를, 국경 지대인 양계에는 병마사를 파견하였다.
⭐️ 고려 시대에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·부곡·소가 있었다.
⭐️고려의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 및 국경 방위를 맡는 6위로 구성되었다.
⭐️ 고려 시대 5도에는 예비군 성격의 주현군이, 양계에는 상비군 성격의 주진군이 설치되었다.
📖 10강 추가 내용
<고려의 왕>
태조 👉🏻 흑창 설치, 기인 제도, 사심관 제도, 발해 유민 포용, 북진 정책(서경 중시)
광종 👉🏻 노비안검법, 과거제, 호족 진압, 공복 제정, 광덕/준풍
경종 👉🏻 시정 전시과
성종 👉🏻 최승로의 시무28조 받아들임, 중앙 - 2성 6부, 지방 12목, 향리제 정비