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️⃣6️⃣ 강. 조선 후기(문화 1)
⭐️ 김장생은 가례집람을 저술하여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였다.
⭐️ 박세당은 사변록에서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도하였다.
⭐️ 명대 왕수인이 정립한 양명학은 성리학의 교조화를 비판하며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.
⭐️ 정제두는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.
⭐️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신분에 따라 토지를 차등 분배하는 균전론을 주장하였다.
⭐️ 이익은 곽우록과 성호사설에서 영업전을 설정하여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.
⭐️ 정약용은 경세유표, 목민심서 등의 저서를 통해 국가 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다.
⭐️ 정약용은 여전론을 통해 토지의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주장하였다.
⭐️ 유수원은 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.
⭐️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지전설과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였다.
⭐️ 박지원은 연행사를 따라 청에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집필하였다.
⭐️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및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.
⭐️ 박지원은 양반전을 지어 양반의 무능과 허례를 풍자하였다.
⭐️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 문물의 수용을 강조하고 수레와 배의 이용을 권장하였다.
⭐️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하였다.
⭐️ 박제가, 유득공은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었다.
⭐️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에서 황초령비와 북한산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.
⭐️ 한치윤은 외국 문헌을 이용하여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해동역사를 서술한 역사를 편찬하였다.
⭐️ 이종휘는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로 확장하여 동사를 편찬하였다.
⭐️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.
⭐️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삼한의 위치를 고증하였다.
⭐️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정리한 아방강역고를 저술하였다.
⭐️ 이중환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를 저술하였다.
⭐️ 정상기는 최초로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.
⭐️ 김정호는 산맥, 하천, 포구, 도로망 등을 자세히 표시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.
⭐️ 영조 때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다.
⭐️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 연해의 수산 생물을 조사하여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.
📖 26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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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7️⃣ 강. 조선 후기(문화 2)
⭐️ 선조 때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가 전래되었다.
⭐️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은 지전설을 주장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 김육의 건의에 따라 청으로부터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이 도입되었다.
⭐️ 광해군 때 전통 한의학을 정리한 허준의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.
⭐️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홍역에 대한 의학 지식을 정리하였다.
⭐️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.
⭐️ 신속은 농가집성에서 모내기법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.
⭐️ 서유구는 농업 기술의 혁신 방안을 제시한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였다.
⭐️ 박세당은 색경을 저술하여 인삼, 담배 등의 상품 작물 재배법을 소개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서당 교육의 보급을 배경으로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노래와 사설로 줄거리를 풀어가는 판소리가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양반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담은 탈춤이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홍길동전, 춘향전 등의 한글 소설이 등장하여 서민들 사이에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감정을 솔직하에 표현한 사설시조가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삼아 사실적으로 그리는 진경 산수화가 유행하였다.
⭐️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정선은 인왕제색도, 금강전도 등의 작품을 남겼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서민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화가 유행하였따.
⭐️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득신는 파적도 등의 작품을 남겼다.
⭐️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은 월하정인, 단오풍정 등의 작품을 남겼다.
⭐️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는 서당, 무동, 타작 등의 작품을 남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건강과 장수 등을 바라는 민중의 소박한 소망과 기원을 표현한 민화가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회회청 또는 토청 등의 코발트 안료를 사용한 청화 백자가 널리 보급되었다.
⭐️ 17세기에 양반과 지주층의 후원으로 구례 화엄사 각황전, 김제 금산사 미륵전, 보은 법주사 팔상전 등의 불교 건출물이 지어졌다.
⭐️ 정조 때 정약용이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 화성 축조에 이용하였다.
📖 27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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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8️⃣ 강. 개항기(흥선 대원군)
⭐️ 흥선 대원군은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전담하게 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경복군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비용 마련 등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사창제를 실시하였다.
⭐️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의 퇴진을 이끌어 냈다.
⭐️ 1866년에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.
⭐️ 1866년에 박규수와 평양 관민이 대동강으로 침입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.
⭐️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.
⭐️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.
⭐️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.
⭐️ 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.
⭐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1년에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하였다.
⭐️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광성보에서 항전하였다.
⭐️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가 함락되어 조선군의 수자기를 미군에 빼앗겼다.
⭐️ 흥선 대원군은 신미양요 후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는 척화비를 종로와 전국 각지에 건립하였다.
📖 28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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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9️⃣ 강. 개항기(개항~갑신정변)
⭐️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.
⭐️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.
⭐️ 강화도 조약은 부산, 원산, 인천에 개항장이 설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.
⭐️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일본에 해안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(치외 법권) 등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.
⭐️ 조·일 무역 규칙에는 일본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규정이 없었다.
⭐️조·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 일본인의 거류지를 10리로 제한하고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.
⭐️ 개항 이후 정부는 개화 정책을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.
⭐️ 통리기무아문은 소속 부서로 교린사, 군무사, 통상사 등의 12사를 두었다.
⭐️ 조선 정부는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고 별기군을 창설하였다.
⭐️ 조선 정부는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근대식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워 오게 하였다.
⭐️ 영선사는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의 설립 계기를 마련하였다.
⭐️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.
⭐️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귀국할 때 청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왔다.
⭐️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비밀리에 파견하였다.
⭐️ 이만손 등 유생들은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.
⭐️ 별기군 창설 이후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발단이 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.
⭐️ 임오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.
⭐️ 임오군란 후 체결된 조·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통해 청 상인의 내지 통상이 가능해졌다.
⭐️ 임오군란 후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구준을 인정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다.
⭐️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삼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.
⭐️ 개화당 정부는 호조로의 재정 일원화, 문벌 폐지, 인민 평등권 확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혁안을 발표하였다.
⭐️ 갑신정변이 청의 군사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난 후 주동자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.
⭐️ 갑신정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.
⭐️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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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️⃣0️⃣ 강. 개항기(동학 농민 운동~대한 제국)
⭐️ 1885년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.
⭐️ 유길준은 한반도의 중립화를 제기하였으며,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의 근대 문물을 소개하였다.
⭐️ 동학교도는 공주, 삼례 등지에 모여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.
⭐️ 1894년에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한 고부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.
⭐️ 동학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하여 4대 강령을 발표하고 보국안민, 제폭구민을 기치로 내걸고 봉기하였다.
⭐️ 동학 농민군은 1차 봉기 때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.
⭐️ 동학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을 실천해 나갔다.
⭐️ 동학 농민구누은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2차 봉기를 일으켰다.
⭐️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손병희가 이쓰는 북접이 논산에서 연합 부대를 형성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.
⭐️ 동학 농민군은 2차 봉기 때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.
⭐️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.
⭐️ 제1차 갑오개혁 때 중앙의 행정기구를 6조에서 8아문으로 개편하였다.
⭐️ 제1차 갑오개혁 때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였다.
⭐️ 제1차 갑오개혁 때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과거제를 폐지하였다.
⭐️ 제2차 갑오개혁 때 고종은 국정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.
⭐️ 제2차 갑오개혁 때 지방 행정 구역을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고,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독립시켰다.
⭐️ 제2차 갑오개혁 때 교육 입국 조서가 반포되고 이에 따라 근대식 교육 제도가 마련되었다.
⭐️ 교육 입국 조서 반포 후 교원 양성을 위한 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마련되었다.
⭐️ 일본은 조선 정부가 친러 정책을 추진하자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.
⭐️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 때 태양력이 채택되고 건양이라는 연호가 제정되었다.
⭐️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 파천이 일어났다.
⭐️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열어 민중 계몽과 민권 신장을 추구하였다.
⭐️ 독립 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.
⭐️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.
⭐️ 독립 협회는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.
⭐️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.
⭐️ 대한 제구구은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다.
⭐️ 광무개혁 때 황제의 군 통수권 장악을 위해 황제 직속의 원수부가 설치되었다.
⭐️ 대한 제국은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하였다.
⭐️ 광무개혁으로 관립 실업 교육 기관인 상공 학교가 설립되었다.
⭐️ 대한 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면서 관립 의학교와 국립 병원인 광제원을 설립하였다.
📖 30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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