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️⃣1️⃣ 강. 조선 전기(문화 2)
⭐️ 태종 때 주자소가 설치되어 계미자가 주조되었다.
⭐️ 세종 때 개량된 금속 활자인 갑인자가 주조되었다.
⭐️ 태종 때 고구려의 천문도를 참고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되었다.
⭐️ 세종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측우기가 제작되었다.
⭐️ 세종 때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해시계인 앙부일구, 물시계인 자격루 등이 발명되었다.
⭐️ 세종 때 이순지 등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인 칠정산을 만들었다.
⭐️ 세종 때 우리 고유의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되었다.
⭐️ 의방유취는 세종 때 기존의 의학서를 집대성하여 편찬한 의학 백과사전이다.
⭐️ 세종 때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기록한 농사직설이 간행되었다.
⭐️ 강희맹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농서인 금양잡록을 저술하였다.
⭐️ 세종은 우리 고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.
⭐️ 조선 건국 이후 법궁으로 경복궁이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.
⭐️ 조선 건국 이후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가 경복궁 동쪽에 세워졌다.
⭐️ 경복궁 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세워졌다.
⭐️ 조선 전기의 불교 건축물로는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 있다.
⭐️ 조선 전기에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영향을 받은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세워졌다.
⭐️ 국왕으로부터 편액과 함께 서적 등을 하사받은 서원을 사액 서원이라고 한다.
⭐️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은 후에 이황의 건의로 사액되면서 소수 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.
⭐️ 소수 서원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.
⭐️ 분청사기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맑게 거른 백토로 표면을 꾸민 뒤 유약을 씌워 구운 도자기이다.
⭐️ 16세기 백자는 깨끗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으로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.
⭐️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그림이다.
⭐️ 몽유도원도는 안견 안평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으로,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가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.
⭐️ 조선 중기에 사대부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, 난초, 국화, 대나무의 사군자를 즐겨 그렸다.
⭐️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.
⭐️ 조선 중기에 정철은 관동별곡, 사미인곡 등의 작품을 지었다.
📖 21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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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2️⃣ 강. 조선 후기(정치)
⭐️ 사림은 척신 정치의 청산과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.
⭐️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.
⭐️ 건저 문제로 권력을 잡은 동인은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었다.
⭐️ 광해군이 즉위한 후 중립 외교를 지지한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.
⭐️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.
⭐️ 현종 때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예송이 전개되었다.
⭐️ 1차 예송(기해예송)에서는 자의 대비가 상복을 1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.
⭐️ 2차 예송(갑인예송)에서는 남인이 주장한 1년설이 받아들여져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.
⭐️ 숙종 즉위 후 국왕이 주도하여 집권 붕당을 급격하게 교체하는 환국이 되풀이되면서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.
⭐️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허적, 윤휴 등의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.
⭐️ 숙종 때 원자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발생하여 남인이 집권하였다.
⭐️ 기사환국으로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.
⭐️ 숙종은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대거 중용하였으며, 폐위하였던 왕비를 복위시켰다.
⭐️ 갑술환국 이후 서인에서 나뉜 노론과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.
⭐️ 영조는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라는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였다.
⭐️ 영조는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.
⭐️ 영조는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여 주고자 1년에 군포 1필을 징수하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.
⭐️ 영조는 홍수에 대비하여 준천사를 신설하고 청계천을 준설하였다.
⭐️ 정조는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.
⭐️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 친위 부대로 장용영을 설치하였다.
⭐️ 정조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.
⭐️ 정조는 유득공, 이덕무,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의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하였다.
⭐️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하였다.
⭐️ 정조는 대외 관계를 정리한 동문휘고를 간행하였다.
⭐️ 정조 사후 안동 김씨, 풍양 조씨 등 왕실의 외척을 비롯한 소수 특정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.
⭐️ 비변사는 세도 정치 시기에 외척 세력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.
⭐️ 세도 정치 시기에 매관매직 등의 비리가 만연하였다.
⭐️ 세도 정치 시기에 전정, 군정, 환곡 등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어 백성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다.
📖 22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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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3️⃣ 강. 조선 후기(조직, 외교)
⭐️ 비변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기능과 권한이 확대되어 국정 최고 기구의 역할을 하였다.
⭐️ 훈련도감은 포수, 사수,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.
⭐️ 훈련도감은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 주축을 이루었다.
⭐️ 인조는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는 어영청을 설치하였다.
⭐️ 인조 때 총융청과 수어청이 설치되어 수도의 외각을 수비하였다.
⭐️ 5군영 중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는 어영청을 중심으로 북벌이 추진되었다.
⭐️ 숙종 때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.
⭐️ 임진왜란 당시 지방군으로 양반에서 노비까지 모든 신분이 포함된 속오군이 편성되었다.
⭐️ 광해군 때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일본과 무역을 재개하였다.
⭐️ 광해군은 후금과 전쟁에 나선 명의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이끄는 부대를 파병하였다.
⭐️ 정묘호란 당시 용골산성에서 정봉수와 이립이 의병을 이끌고 항전하였다.
⭐️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.
⭐️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.
⭐️ 병자호란 당시 김준룡은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였다.
⭐️ 효종은 청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다.
⭐️ 효종은 청의 요청에 따라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두 차례 파견하였다.
⭐️ 숙종 때 청과의 국경을 정한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었다.
⭐️ 백두산정계비문의 토문강 위치를 두고 한국과 중국의 의견이 달라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자는 북학론이 등장하였는데, 대표적인 학자로 박지원, 박제가 등이 있다.
⭐️ 대한 제국은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을 보호·관리하기 위해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.
⭐️ 임진왜란 후 조선은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.
⭐️ 통신사는 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되어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.
⭐️ 숙종 때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.
⭐️ 대한 제국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가 대한 제국의 관할 영토임을 명시하였다.
⭐️ 일본은 러·일 전쟁 중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다.
📖 23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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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4️⃣ 강. 조선 후기(경제)
⭐️ 인조는 풍흉과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쌀 4~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실시하였다.
⭐️ 광해군은 공납을 개혁하여 소유한 토지 결수에 따라 쌀, 면포, 동전 등으로 내게 하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였다.
⭐️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였다.
⭐️ 영조는 농민의 군포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1년에 군포 1필만 징수하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.
⭐️ 균역법 시행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의 결작을 부과하였다.
⭐️ 균역법 시행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선무군관포를 징수하였다.
⭐️ 균역법 시행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어염세, 선박세를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켰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담배와 면화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기근이 심할 때 주식 대신 먹을 수 있는 감자, 고구마 등의 구황 작물이 재배되었다.
⭐️ 조선 후기에 모내기법이 확상되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수확량과 상관없이 미리 지대의 액수를 정해서 납부하는 도조법이 확산되었다.
⭐️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이 가진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각지의 장시를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하는 보부상에 의해 전국의 장시가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되었다.
⭐️ 조선 후기에 포구나 큰 규모의 장시에서 객주와 여각이 물품매매 중개, 금융·숙박업 등에 종사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가 활동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었다.
⭐️ 조선 후기에는 국경 지대에서 공무역인 개시 무역과 사무역인 후시 무역이 이루어졌다.
⭐️ 개성의 송상과 의주의 만상은 청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.
⭐️ 의주의 만상은 책문 후시를 통해 대청 무역을 주도하였다.
⭐️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송상은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였다.
⭐️ 경강상인은 한강을 근거지로 운송업에 종사하였고, 이를 바탕으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일 무역에서 동래 상인인 내상의 활약이 두드러졌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공인이나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미리 대금을 주고 물건을 주문하는 선대제가 유행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정부는 설점수세제를 시행하여 민간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세금을 거두었다.
⭐️ 조선 후기에 물주의 자금을 받아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가 등장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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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️⃣5️⃣ 강. 조선 후기(사회)
⭐️ 조선 후기에 부를 축적한 상민층은 납속과 공명첩을 이용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부농층은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방법으로 양반 신분을 얻기도 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공명첩 매입, 족보 위조 등으로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서얼은 수차례 통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,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기도 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기술직 중인은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달라는 대규모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 중인도 시사를 조직하여 위항 문학 활동을 하였다.
⭐️ 순조는 군역 대상자를 확보하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공노비를 해방하였다.
⭐️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,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널리 유행하였다.
⭐️ 청에 다녀온사신들에 의해 천주교가 서학으로 소개되었다.
⭐️ 순조 때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었다.
⭐️ 신유박해 당시 이승훈, 정약용 등이 연루되어 처벌되었다.
⭐️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.
⭐️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이 외국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하였다.
⭐️ 동학은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인내천 사상을 내세워 인간 평등을 주장하였다.
⭐️ 동학은 유·불·선을 바탕으로 민간 신앙의 요소까지 포함하였다.
⭐️ 동학은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강조하였다.
⭐️ 동학에서는 동경대전와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삼았다.
⭐️ 순조 때 지배층의 수탈과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.
⭐️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의가산, 선천, 정주 등을 점령하였다.
⭐️ 1862년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이 발단이 되어 진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.
⭐️ 경상 우병사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진주 농민들이 유계춘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.
⭐️ 조선 정부는 진주 농민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.
⭐️ 조선 정부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해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.
📖 25강 추가 내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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